을미사변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던 국왕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친일정권을 타도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던 사건이다.
시종원경(侍從院卿) 이재순(李載純), 시종(侍從) 임최수(林最洙), 탁지부사계국장(度支部司計局長) 김재풍(金在豐), 참령(參領) 이도철(李道徹), 정위(正尉) 이민굉(李敏宏), 전의원(前議員) 이충구(李忠求), 중추원의관(中樞院議官) 안경수(安駉壽) 등이 합작, 모의하였다.
여기에 정동파(貞洞派) 관료 이범진(李範瑨)·이윤용(李允用)·이완용(李完用)·윤웅렬(尹雄烈)윤치호(尹致昊)·이하영(李夏榮)·민상호(閔商鎬)·현흥택(玄興澤) 등이 호응하였다. 또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(南萬里)와 제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(李奎泓) 이하 수십명의 장교가 가담하였다.
언더우드(Underwood, H. G.)·에비슨(Avison, O. R.)·헐버트(Hulbert, H. B.)·다이(Dye, W. Mc) 등 미국인 선교사와 교사 및 교관, 그리고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(Allen, H. N.), 러시아공사 베베르(Veber, K. I.)와 같은 구미외교관도 이 사건에 직접·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.
1895년 11월 28일 새벽에 남만리와 이규홍 등의 중대장은 800명의 군인을 인솔,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(建春門)에 이르러 입궐을 기도하였다. 뜻대로 안 되자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하였다. 그런데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(李軫鎬)가 배신해 미리 서리군부대신 어윤중(魚允中)에게 밀고하였다.
그리하여 쿠데타군이 춘생문에 나타나자 궁성 내의 친위부대가 즉각 반격을 가하고 또 어윤중이 직접 현장에 달려와 선무공작을 폄으로써 일부 쿠데타군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.
이 사건으로 체포된 임최수·이도철은 사형, 이민굉·이충구 등은 종신유배형, 이재순·안경수·김재풍·남만리 등은 태(笞) 100,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.
한편, 거사가 실패하자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하였다. 일본측은 이 ‘국왕탈취사건’에 서양인이 직접·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대서특필하였다.
그리고 이를 기화로 히로시마(廣島)감옥에 수감 중이던 을미사변 관련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전원 석방하였다.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세력인 정동파는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(俄館播遷)을 성사시켜 일시적이나마 일본세력을 물러나게 하였다.